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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 천재들의 충돌, 영화 승부 (이창호 조훈현 이야기)

by ghkuio13570 2025. 5. 17.

 

 

2023년 개봉한 영화 ‘승부’는 단순한 바둑 영화가 아닙니다. 이 작품은 한국 바둑사에 한 획을 그은 스승 조훈현과 제자 이창호의 실존 대결을 모티브로 하여, 두 천재의 충돌과 감정의 해체, 그리고 관계의 재정의를 깊이 있게 그려낸 작품입니다. 바둑이라는 고요한 판 위에서 벌어지는 가장 치열한 인간극을 통해, ‘진짜 승부란 무엇인가’라는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는 영화입니다.

1. 조훈현 vs 이창호, 두 바둑 천재의 서사적 구도

이병헌이 연기한 조훈현은 ‘바둑 대통령’이라 불렸던 전설의 기사입니다. 그는 후계자 양성을 위해 여러 유망주들을 받아들이지만, 어린 시절의 이창호(유재명)를 발견하고, 그의 재능을 누구보다 먼저 알아보고 직접 지도하며 키웁니다.

이창호는 그 기대에 부응해 성장해 가지만, 동시에 스승을 넘어서야만 하는 위치로 향합니다. 영화는 이 관계의 변화를 다음과 같은 3단 구조로 보여줍니다.

  • 1단계: 존경과 헌신의 시기 – 어린 이창호가 조훈현의 한 수 한 수를 외우고 따르며 신뢰를 쌓는 시기
  • 2단계: 평등과 긴장의 시기 – 이창호가 독자적인 기풍을 갖추고 실력으로 대등해지며 긴장감이 생깁니다
  • 3단계: 충돌과 독립의 시기 – 공식 대국에서 스승을 이기고, 사제 관계가 무너지는 결정적 순간이 다가옵니다

이 세 단계는 단순히 바둑 승부를 넘어서, 한 세대의 종말과 새로운 세대의 탄생이라는 거대한 흐름을 담고 있으며, 그 중심에는 인간적인 아픔과 성장, 이별이 함께 존재합니다.

2. 실화 기반: 영화가 구현한 바둑계의 전설적 순간

이 영화는 픽션이지만, 실제 조훈현-이창호 사제의 역사에 깊은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 조훈현: 국내 일인자로 수십 년을 군림하며 바둑의 대중화에 큰 역할을 했습니다.
  • 이창호: 11세에 조훈현의 제자로 입문하여, 1990년대 중반부터 전 세계 바둑계를 평정했습니다.

그들의 첫 대국은 실제로도 역사적인 순간이었으며, 이창호가 스승을 꺾은 후에는 한 시대가 저물고 새 시대가 시작됐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영화 <승부>는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 심리적 갈등과 정서적 진폭을 부여함으로써, 단순한 이기고 지는 게임이 아닌, 존재를 넘어서야만 하는 제자의 고뇌넘어질 줄 알면서도 맞서야 하는 스승의 복잡한 심경을 담아냅니다.

3. ‘바둑’이라는 조용한 스포츠의 영화적 활용

<승부>는 소리 없는 스포츠인 바둑을 영화화하는 데 탁월한 성과를 보여줍니다. 액션이 없지만 긴장감은 팽팽하며, 대사는 적지만 감정은 풍부합니다. 바둑은 여기서 단순한 게임이 아니라 세대와 철학, 인간관계의 은유로 작용합니다.

  • 조훈현의 바둑: 공격적이고 직관적인 전통의 바둑
  • 이창호의 바둑: 계산과 안정성을 중시한 실용주의적 현대 바둑

이 대립은 바둑판 위에서 뿐 아니라, 사고방식, 인간관, 세상에 대한 태도로 이어지며 영화의 주제의식을 강화합니다.

또한 영화는 대국 장면에서 빠른 편집이나 음악으로 극적 효과를 의도하지 않습니다. 대신 침묵, 시선 교차, 손의 움직임 같은 미세한 변화로 심리의 흐름을 표현합니다. 그 절제된 연출은 영화 전체의 품격을 높이고, 관객의 몰입을 이끕니다.

4. 스승과 제자, 그 경계의 윤리적 딜레마

가장 감정적인 갈등은 결국 ‘스승과 제자’라는 관계에 있습니다. 조훈현은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제자를 키웠지만, 이창호가 스승을 이긴 뒤부터는 질투, 공허함, 소외감 같은 인간적 감정에 휩싸입니다.

반면 이창호는 스승의 기대를 짊어진 채 자라난 존재입니다. 스스로 선택한 길이지만, 그가 조훈현을 이겼을 때, 진심으로 기뻐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 승부가 단순한 결과가 아닌, 관계의 붕괴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가르친 제자가 나를 이긴다면, 나는 그를 진심으로 축하할 수 있는가?”

이 질문은 관객 각자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 갈등 구조입니다. 부모와 자녀, 사수와 후임, 선배와 후배, 스승과 제자… 그 어떤 관계에서도 ‘넘어섬과 수용’은 갈등의 원천이 됩니다.

결론: 영화 <승부>는 결국 인간과 관계에 대한 성찰이다

<승부>는 바둑 영화이지만, 바둑을 모르는 사람도 깊이 빠져들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영화의 본질은 인간관계의 변화와 갈등, 수용과 이별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 영화는 말합니다. 진정한 승부란, 누군가를 이기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이해하고, 인정하고, 놓아주는 것이라고.

영화가 끝난 후, 관객은 묻게 됩니다. “나는 지금 내 삶의 승부에서 무엇을 걸고 있는가?” 그리고 그 질문은 영화보다 더 오래, 우리 마음속에 남습니다.